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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생활 3년 차, 가끔 찾아오는 묘한 고독감에 대하여

오늘 퇴근길은 유독 오토바이 경적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때렸습니다. 하노이 생활도 이제 3년, 이 지독한 소음과 매연에도 이력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이렇게 예고 없이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네요. 헬멧 사이로 끈적하게 들어오는 하노이 특유의 덥습한 공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습니다. 사실 베트남에서 가정을 꾸리고 아내와 함께 지내면서 외로울 틈이 어디 있겠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맞는 말이죠. 퇴근하고 집에 가면 따뜻한 밥이 있고 나를 반겨주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방인 특유의 고독감이 불쑥 찾아오곤 합니다. 이건 한국말로 마음껏 수다를 떨고 싶은 갈증이라기보다는, 그..

별거 아닌데 괜히 웃음이 나왔던 하노이의 저녁

퇴근길 정체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심했다. 하노이의 금요일 오후는 늘 그렇듯 오토바이 매연과 경적 소리가 뒤섞여 거대한 소음의 장벽을 만들어낸다. 헬멧 속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려 눈가가 따끔거렸지만, 핸들을 쥔 손을 뗄 수가 없어 그냥 눈을 몇 번 껌뻑이며 버텼다. 앞차의 번호판 숫자를 의미 없이 세어보기도 하고, 옆에 선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초췌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특별히 기분이 나쁜 것도,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닌 그냥 무채색의 시간들이 도로 위에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머릿속에 들어찬 것이 없었다.집 근처 골목 입구에 다다랐을 때, 평소에 보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부채질을 하던 구멍가게 아저씨가 길을 지나..

베트남 은행에서 계좌 하나 만들려다 하루를 다 보낸 사연

베트남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이제는 웬만한 행정 업무에는 이력이 났다고 자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비자도 직접 해결했고, 병원 이용이나 보험 문제도 나름의 시행착오 끝에 정리가 되었으니 '은행 계좌 만들기'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하노이 시내의 한 유명 은행 지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제가 마주한 현실은 또 한 번 저의 오만함을 깨뜨려 놓았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했습니다. 현지에서 생활비 관리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하고 싶어 현지 은행 계좌가 필요했고, 아내의 추천을 받아 가장 신뢰도가 높다는 대형 은행을 찾았습니다. 한국에서 계좌를 만들 때처럼 신분증 하나면 충분할 거라는 생각에 여권만 달랑 챙겨 나섰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은행 입구에서 번호표를 뽑고 30분을..